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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 - 세상의 기괴함에 관한 스무 주제의 10분에세이

도서출판 오롯 2016. 2. 18. 13:55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 – 세상의 기괴함에 관한 스무 주제의 10분에세이

∙ 원제 : Enzensbergers Panoptikum. Zwanzig Zehn-Minuten-Essays
∙ 글쓴이 :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 옮긴이 : 원성철
∙ 판형 : A5신판 변형(142×215mm), 반양장(무선)
∙ 분량 : 224쪽
∙ 분류 : 인문, 사회
∙ 정가 : 15,000원
∙ 펴낸곳 : 도서출판 오롯

∙ ISBN : 979-11-950146-5-1     03300



글쓴이|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Hans Magnus Enzensberger)


1929년 독일 남부 카우프보이렌에서 태어났으며, 프라이부르크 대학, 함부르크 대학, 파리 대학 등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55년 독일 시인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때 슈투트가르트의 라디오 방송국에 근무하기도 했으며, 전후 신진작가들의 모임인 ‘47년 그룹(Gruppe 47)’에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과 1978년 독일 비평가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유럽 문화의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소닝 상을 받았다.


전후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시ㆍ에세이ㆍ희곡ㆍ소설ㆍ비평ㆍ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벌였다. 특히 사회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작품으로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회파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안드레아스 탈마이어(Andreas Thalmayr)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수학귀신』처럼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작품도 여럿 발표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에서 폭넓게 읽히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수학귀신』, 『양들을 노리는 늑대들 물리치기』, 『로베르트 너 어디 있었니』, 『달과 달팽이』, 『빕스의 엉뚱한 소원』,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죽음』,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타이타닉의 침몰』, 『늑대들의 변명』, 『정치와 범죄』, 『대중매체와 의식조작』 등이 옮겨져 있다.


옮긴이| 원성철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독일 밤베르크대학교와 튀빙겐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종교학을 전공했다. 역서로 『이야기꾼』(쉘 요한손), 『우리의 아름다운 새옷』(잉고 슐체), 『저항안내서』(하랄트 벨처) 등이 있다.



우리 세계의 감추어진 기괴한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으로 들어오라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는 생각하기에 중독된 사람이다. 우리들의 지적 욕구를 무한히 충족시켜 주는 그의 박학함에 고마움과 경의를 표한다. - Fuldaer Zeitung

 

흥분한 도덕군자가 비도덕적인 사회를 향해 비난을 퍼부어대고 있으리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원칙이다. 그렇다고 원칙 없는 무질서에 대한 탄식만으로 채워져 있으리라고 여긴다면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책을 펼쳐 보라. 사람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건강한 질서에 대한 엔첸스베르거의 경탄이 책 곳곳에서 들려올 것이다. - Die Welt

 

 

위선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

 

‘판옵티콘’이라고 하면 대부분 제러미 벤담이 고안해낸 원형감옥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중ㆍ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러미 벤담의 것과는 다른 판옵티콘도 있다.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들을 남겨서 같은 시대에 영미권에서 활동한 찰리 채플린에 비견되기도 하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희극배우 카를 발렌틴은 1935년에 ‘판옵티콘’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곳에는 기괴하고 비틀린 현대 문명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는 발명품들과 사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전시되어 있었다.

 

알다시피 ‘판옵티콘’은 ‘모두’를 뜻하는 말과 ‘보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를 놓고 본다면 한 명의 간수가 다수의 죄수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하도록 설계된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이 기능적인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면, 카를 발렌틴의 판옵티콘은 사회ㆍ문명에 대한 비평의 차원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죄수들 스스로 감시와 규율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제러미 벤담의 흉악한 원형감옥도 현대 문명의 기괴하게 비틀린 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카를 발렌틴의 판옵티콘에 전시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에도 카를 발렌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자본과 정치권력이 빚어낸 이 세상의 기괴한 모습들이 한 자리에 전시되어 있다. 엔첸스베르거는 풍자와 비판정신을 도구로 삼아 위선과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우리 시대의 모습을 20개의 주제로 그려낸다.

 

80대의 노작가가 그려낸 시대의 초상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는 시ㆍ에세이ㆍ희곡ㆍ소설ㆍ비평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전후 독일 문학을 이끌어온 작가이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수학귀신》처럼 어린이ㆍ청소년를 위한 작품들이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이후 가장 중요한 사회파 작가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사회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작품들을 주로 발표해왔다.

 

엔첸스베르거는 1929년에 태어났으니 한국 나이로는 어느덧 (2016년을 기준으로) 88살이나 되었다. 이 책은 그가 84세 때인 2012년에 처음 출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비평이나 에세이는 대부분 오랜 세월에 걸쳐 다른 지면에 발표했던 것들을 모아서 책으로 펴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책은 1/4인 5편만 《슈피겔》 등에 미리 발표했던 것이며 나머지 3/4은 이 책에서 처음 발표된 글들이다. 그만큼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계속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인데, 90대의 나이를 앞에 두고도 노작가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비판의식이 전혀 무디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재치 있고 생동감 있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 놀랍고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되살린 에세이의 비판정신 

 

엔첸스베르거는 현대 문명의 기괴하고 뒤틀린 모습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기 위해 스스로 ‘10분 에세이(Zehn-Minuten-Essays)’라고 부른 짧은 글의 형식을 채택한다. 그는 에세이의 위대한 선조인 몽테뉴를 따라서, 그리고 한 쪽이면 충분할 것을 한 권으로 쓰지 말라는 리히텐베르크의 말을 좇아서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몇 쪽 되지 않는 짧은 글의 형식으로 다룬다.

 

하지만 분량이 짧다고 해서 깊이도 얕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꼭 장황하고 복잡한 말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말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하거나 말문을 막아서 사물의 실체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사물의 실체를 바르게 인식하고 밝히는 데에는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과 한 마디 외침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러한 눈을 ‘혜안(慧眼)’이라는 말로 나타내기도 한다.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가 ‘10분 에세이’라는 짧은 글의 형식을 채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본질을 꿰뚫는 혜안과 날카로운 풍자로 온갖 복잡한 논리와 미사여구를 사용해 ‘불가피성’을 내세우고 있는 ‘벌거벗은 행렬’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처럼 몇 쪽 되지 않는 짧은 글로 우리 세계의 감춰진 모습을 들추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투지가 필요한 하나의 도전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책을 펼쳐들면 곳곳에서 정신의 번개가 번쩍인다.

 

스무 개의 주제로 살펴보는 현대 사회의 맨 얼굴

 

그가 이 책에서 20편의 짧은 글들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실로 다양하다. 〈작은 경제학〉이라는 글에서는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논리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는지 밝히고 있으며, 〈풀 수 없는 문제〉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엘리트주의를 풍자한다. 〈책상 위에서 국가를 발명하는 방법〉에서는 국가주의ㆍ민족주의의 기원과 그것이 지닌 배타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연금 희망, 연금 불안, 연금 강요〉라는 글에서는 고령화에 따라 모든 사회에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연금과 정년 문제를 다룬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ㆍ소비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나타난 문화적 변동들에 관해서도 여러 개의 주제로 나누어 다룬다. 〈60억 명의 전문가〉라는 글에서는 이른바 ‘덕후’라고 불리는,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진 개인적인 전문가의 출현이라는 문화적 현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투명함의 음험함〉과 〈불쌍한 오웰〉이라는 글에서는 사이버 전체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며, 〈유쾌한 문화의 불쾌함〉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문화산업의 과잉과 수탈구조에 관해 다룬다. 〈마치 그런 것처럼〉과 〈사진과 함께 어디로〉에서는 시각 매체의 발달에 따른 문화의 변동과 인식의 문제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밖에 스파이물의 범람에 관해 다룬 〈우주적 기밀〉이나 성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다룬 〈섹스는 필요한가?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 관한 〈학문이 세속적인 종교인가〉와 같은 글들도 있다. 한마디로 현대 사회에서 정치ㆍ사회ㆍ문화 등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거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이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정신에 기초해 한 자리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식과 창의적인 비판정신

 

그러나 그 글들은 각각의 문제들에 대해 단지 어떤 특정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 우리가 엔첸스베르거의 글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큰 감흥을 얻게 되는 것은 이 노작가가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이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과 무디어지지 않는 비판정신, 그리고 인간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관한 따뜻한 믿음과 같은 것들 말이다.

 

엔첸스베르거에게 현대 사회의 문제들은 그것이 아무리 거창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들이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떨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짧은 글 안에서도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현대 문명의 근원적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밝히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그 사고의 자유로움과 탄력성이 딱딱하게 굳어진 우리 머리의 근육을 끊임없이 두드리며 풀어준다.

 

예컨대 〈왜 모든 것은 더러워지는 것일까〉라는 글을 보면 이러한 사고의 자유로움이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엔첸스베르거는 넘쳐나는 세제의 종류 등을 예로 들며 강박증에 빠질 만큼 청결함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념으로 뒷받침된 청소의 과정에서 결벽증은 돌연변이를 일으켜 대량학살로 나타나기도 한다”면서 그것을 현대 문명에 내재된 정신적 결벽증이 지닌 위험과 연관시킨다. ‘위생’도 하나의 산업이 된 시대에서 광고 등으로 끊임없이 부추겨지는 청결함에 대한 강박이 다른 문화와 사회에 대한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엔첸스베르거는 우리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서로 연결시키며 논의를 이끌어가는데, 그 과정에서 해학과 풍자의 비판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정보기관을 다 씹고 길바닥에 버려진 껌과 연결시켜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하며, 우리 자신들이 경제라는 이름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살펴보면 “경제학자들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신봉하고 있는 경제적 이성이라는 것이 실은 미친 사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신랄하게 꼬집기도 한다. 그리고 성서와 같은 고대의 문헌들에 등장하는 성에 견주면 오늘날의 새로운 성들을 매우 온건한 편이라면서 이성애만을 정상이라고 생각해 “자신과는 다른 범주의 사람들을 차별하려는” 이들에 관해 “가끔은 그들이 탈레반이나 물라와 같은 초강경 근본주의자들에 대해 마음 깊이 동조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생기기도 한다”고 밝히기도 한다.

 

이렇게 엔첸스베르거의 글들은 촌철살인의 풍자를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무례하거나 사납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노작가가 인간의 다양성과 창의성에 대한 따뜻하고 낙관적인 믿음을 시종일관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기 삶의 양식만을 정상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실은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예외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이든 “사람들이 때때로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모두 다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다양성이야말로 인류 문명이 지속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고 강변한다. “그것이 하나의 닫힌 시스템일 경우에는 그 칙칙하고 단조로운 회색으로부터 더 이상 다채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 누군가 계속해서 새로운 색깔의 물감을 통 안에 붓고, 그렇게 해서 다채로운 색깔과 무늬의 물결들이 끝없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물결이 결코 끝나지 않게끔 끝없이 새로운 물감을 쏟아 부어서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게 만드는 자,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인 것이다.”

 

자, 자본과 정치권력이 신화화해 놓은 우리 세계의 감춰진 기괴한 얼굴을 보고 싶은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우리 시대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엔첸스베르거의 판옵티콘으로 입장하시라.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언론사 보도


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2/24/0200000000AKR20160224090100005.HTML?input=1179m

 

서울경제

 

http://economy.hankooki.com/lpage/entv/201602/e20160226103309118180.htm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32188.html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v/c8a03f9989ec420c958d9a74a06459d6

 

서울대 대학신문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93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180